사이버 장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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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3457 |
등록일 | 2014/07/31 00:00 | ||
잊혀질 권리 <VOGUE> 2011년 06월호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완전히 잊혀질 것인가, 영원히 기억될 것인가? 가까운 미래에 이 둘 모두 가능해진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겼다면 21세기 사람들은 죽어서 트위터를 남긴다. 블로그와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 남겨진 흔적들은 주인이 사라진 후에도 유령처럼 남아 세상을 떠돈다. 기분 나쁜 일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증손녀가 할머니의 70년 전 연애 고민 상담을 구경하게 되는 것 정도야 귀여운 해프닝이라고 쳐도, 100년 동안 방치된 미니홈피란 폐가처럼 스산하다.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건 그 때문이다. 아무리 비밀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 방송통신위원회는 5월 2일, SNS이용자가 본인의 게시물을 자유롭게 파기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장치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온라인상의 모든 정보 삭제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태어나는 날은 정해져 있어도 죽는 날은 아무도 모르는 법. 본인이 직접 이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누군가 대신 처리해줄 수 있도록 나의 계정과 디지털 자산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면?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는 최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중이다. 성동진 KISO사무처장의 말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지난 4월 말부터 디지털 유산과 관련한 연구 진행을 시작한 상태다. “일단 연구는 10월까지로 되어 있어요. 현금화가 가능한 포인트나 도토리, 게임 아이템같이 재산상의 의미가 있는 것들을 상속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정리가 끝나진 않았죠. 사망자가 게시판에 남긴 글이나 계정, 이메일 내역도 유족의 요청이 있다면 상속 가능할 수 있지만, 개인 정보 침해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좀더 논의를 해야 합니다. 포털 사이트에게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선으로 끝날지, 법제화시킬지도 올해 말 즈음 되어야 알 수 있겠죠.” 해외에서는 이 혼란의 틈을 타고 온라인 상조회사라는 신종 업종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300달러를 내고 인터넷 계정 처리에 관한 유언을 남기면 회원 대신 사이버 장례식을 치러주는 ‘라이프인슈어드닷컴(www.lifeensured.com)’ 같은 경우다. 사망신고가 행정안전망을 통해 접수되면 생전에 회원이 요청한 대로 친구들에게 마지막 이메일을 보내고 각종 사이트에 올린 사진을 삭제하는 일까지 도맡아 처리한다. 만약 온라인 교제 사이트를 통해 데이트 신청이 들어온다면, “전 이미 천사가 되었답니다”라고 자동응답해주는 서비스도 가능하다. ‘애셋로커’는 사후에 개인의 사진과 문제, 이메일 등 귀중한 디지털 자산을 보관해주는 안전 금고를 제공하고, ‘레거시로커(Legacy Locker)’는 지메일이나 페이스북, 이베이 등의 이용자들이 생전에 보관해둔 온라인 계정 정보를 유족에게 전달해주는 서비스다. 인터넷 사이트 가입과 동시에 사망 후의 디지털 콘텐츠 이용 방안에 대해 미리 정해두는 경우도 있다.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사망 사실이 확인되면 제3자에 의한 계정 삭제 물론, 내용을 변경하거나 계정의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주인 없는 ‘담벼락’에 글을 쓰는 것을 차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트위터는 고안이 생전에 남긴 트윗을 모두 모아 신청자에게 전달한다. 국내에서는 법적인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다. 현행법상 미니홈피나 블로그는 타인에게 명의를 빌려주거나 유족에게 물려줄 수 없기 때문에, 유족이 사망을 증명하는 서류를 갖춰 정보통신 서비스 제공자에게 요청하면 탈퇴나 폐쇄 신청은 할 수 있다. 네이버와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사망 여부와 가족관계가 서류를 통해 확인될 경우, 업로드 된 데이터의 백업까지는 가능하다. 최진실을 비롯해 세상을 떠난 몇몇 유명인사의 미니홈피는 제3자가 생전에 미리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데다 추모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특수한 경우다. 소설가 김장환의 〈굿바이 욘더〉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저장된 사이버 공간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다.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 작가는 오래 전 죽은 애완동물을 추모하는 사이버 묘지에 관한 기사를 보고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사이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는 뇌를 다운로드 받아 죽은 자들의 도시를 만들어 냈지만, 사진과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100년 전에 죽은 시인 이상과 ‘맞팔’을 맺고 그의 글귀를 140자의 트윗으로 전송 받는 식이다. 완전히 잊혀질 것인가, 영원히 기억될 것인가? 어떤 권리를 택하든 당신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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