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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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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 이미지,  연날리기는 다리밟기와 함께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청계천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연(鳶)이란 이름은 새(鳥) 이름, 즉 연(鳶, 솔개)의 음을 따서 붙인 것으로 하늘 높이 나는 솔개처럼 종이로 만든 연도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나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연날리기 이미지

연날리기는 다리밟기와 함께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청계천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연(鳶)이란 이름은 새(鳥) 이름, 즉 연(鳶, 솔개)의 음을 따서 붙인 것으로 하늘 높이 나는 솔개처럼 종이로 만든 연도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나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즐겨왔으며, 놀이뿐만 아니라 전쟁 또는 통신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신라의 장수 김유신이 반란군을 토벌할 때 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이 반란군을 토벌하는 중 어느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자 패할 징조라면서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큰 연을 만들어 밤에 남몰래 불을 붙여 공중에 높이 띄우고 전날 떨러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으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고 한다.
이에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장수 최영이 역시 외적을 물리칠 때 군사를 연에 매달아 절벽 위 적진에 상륙시켰으며, 또한 불덩이를 연에 매달아 적의 성안으로 날려보내 불타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으로 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외국의 경우 특이할 만한 것은 1752년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Franklin Benjamin)이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하여 번개와 전기의 방전현상이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피뢰침을 발명했다고 한다.
연을 날리는 데는 액(厄)을 쫓는 주술적인 목적도 있었다. 즉 연에다‘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송액(送厄-재앙을 날려 보낸다)’이니‘송액영복(送厄迎福-액을 날려보내고 복을 맞이한다)’이라는 기원문을 쓰고, 날리는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서 날려 보내면 지난 해에 묻혀온 모든 액과 앞으로 1년 동안 있을 나쁜 운수가 일소된다고 믿었다.

연날리기 사진

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일반사람들에게 보급된 때는 조선시대 영조 무렵부터라고 한다.
영조는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자주 구경을 나갔다.
서울의 경우 광통교와 수표교는 연을 날리기에 매우 적당한 장소였다. 대체로 매년 12월 하순이면 여기저기서 연을 날리기 시작하였으나, 본격적인 시기는 정월 보름 며칠 전이면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서울의 경우 매년 정월보름 전 하루 이틀은 광통교와 수표교 등 청계천변에는 연날리기하는 사람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갖가지 연들이 날아올라 서울 하늘을 가득 매웠다고 한다. 청계천 다리 위가 연날리기 장소로 적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천 바닥이 동서로 뚫려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였다. 지금은 하천도 덮여 있고, 많은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지만, 사실 청계천은 물이 흐르는 물길이었을 뿐만아니라 바람이 드나드는 바람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에 놓인 다리 위에서 연을 날리면 자연스럽게 동풍이나 서풍을 이용하여 연을 하늘 높이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연날리기는 다른 우리의 전통민속놀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문명에 밀려 점차 사라져갔다. 청계천 역시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연날리기 장소로서 적절하지 못하게 된데다가 하천이 복개되어 바람길이 막히고, 다리가 사라지면서 연날리기도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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