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이후 일본은 청계천 정비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재원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 모든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은 거의 방치되었다.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잣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마저도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 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 위에 떠 있는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
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잣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되었다.
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다닌다.
그러나 더 이상 청계천을 서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서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을 낙후시키고, 서울의 이미지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적받고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청계천만큼 지난 50년 동안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는 곳은 없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60·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근대화로 상징되었으며, 80·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산업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소음·혼잡·매연 등으로 도시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003년! 지난 40년간 덮여있던 청계천이 다시 열리는 '복개(復開)'가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 청계천에는 새로운 시간의 단층이 한 겹 더 쌓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