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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개천을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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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청계천에서 왕의 시찰 이미지, 세종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행한 준천을 은근히 중국 고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치수나 수(隨)나라 양제(煬帝)의 운하정비와 비교하였으며, 탕평(蕩平)·균역(均役)과 함께 자신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고서의 청계천에서 왕의 시찰 이미지

세종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행한 준천을 은근히 중국 고대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치수나 수(隨)나라 양제(煬帝)의 운하정비와 비교하였으며, 탕평(蕩平)·균역(均役)과 함께 자신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

태종, 세종 때 조성된 개천은 이후 영조가 즉위하기까지 350여년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비가 와서 물이 넘쳐 부근 민가가 침수되고, 다리가 유실되는 등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개천에서 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태종, 세종 때에 정비한 개천의 하수처리 용량이 당시 도성 인구 10만 정도가 쏟아내는 하수를 처리하는 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7·18세기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임진(1592년)·병자(1636년) 두 차례의 전란을 겪는 이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657년(효종 8) 약 8만 명 남짓한 서울의 인구는 10년 후인 1669년(현종 10)에는 1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으로 생활하수는 개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더구나 유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개천 변에 채소밭을 경작함으로써 수로가 막혀 배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17·18세기에는 때아닌 이상기온 현상으로 대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성 주변에 있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어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개천을 메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준천사실 고서 이미지

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영조는 수차례에 걸쳐 그 시행 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 다음 1759년(영조 35)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다.
1760년(영조 36) 2월 18일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준천은 송기교(현재 광화문사거리와 신문로 접점 지점)에서 영도교(현재 영미교길) 까지 총 8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개천에 두텁게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고, 상류 및 지류는 물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 안에 있는 물길도 준설하여 물이 잘 통하게 하였다. 이 준천은 4월 15일까지 총 57일간 시행되었으며, 동원된 인력은 한성부민 15만 명, 고정(雇丁-고용인력) 5만 명 등 모두 20만 명이고, 전(錢) 35,000민(緡), 쌀 2,300여 석(石)이 투입되었다. 준천의 대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영조는 수 차례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한편은 작업을 독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준천의 시말(始末)과 장래에 해야 할 일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하여 이후 개천 준설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였다.

1773년(영조 49) 6월 영조는 다시 한번 개천 정비를 위한 공역을 실시하였다. 1760년 준천을 할 때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던 개천 양안을 석축(石築)을 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三軍門)이 작업구간을 3개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또한 양안에 버드나무를 심어 큰비가 올 때도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1773년의 준천은 시작한 지 2개월 후인 8월 초 완성하였다. 준천의 역사가 끝나자 영조는 왕세손(후에 정조)과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스스로 「준천명(濬川銘)과 소서(小序)」를 지어 자신이 팔십 평생 동안 준천사업에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가 밝히고 있다.
한편, 영조가 개천 준설을 위하여 대역사를 시작한 것은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곧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생계를 위하여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구휼이었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도성축조나 준천과 같은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이들을 고용하였다. 영조가 실시한 준천 역시도 5만여 명의 고용인력이 투입되었다. 즉 준천사업은 오늘날 공공근로사업(1930년대 말 대공황 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뉴딜(New Deal) 정책)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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