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엇다. 무엇보다도 조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1916년경부터는 '개천'이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鐘路)'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 되었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쪽은 '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하였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한 신문에는 "북부(청계천 북쪽) 일대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本町) 일대는 길에 밥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정작 청계천 자체는 대한제국 이후 10여년 동안 방치되었다. 일본은 청계천(淸溪川,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을 이름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경부터였으며, 그것도 서울에서 청계천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보건, 위생 등 서울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일본은 청계천과 일부 지천에 대하여 바닥을 준설하고 양안에 석축을 새로 쌓았다.
1925년부터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청계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천을 비롯하여 옥류동천, 사직동천 등을 복개하였다. 당시 복개는 하천에 'ㅁ'형의 하수관을 만드는 것으로 이로써 지천들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라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다.
1926년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1만 평의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광통교에서 주교정(舟橋町)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1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1935년에는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를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청계천을 덮어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든다는 안이 마련되었고, 1940년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청계천 복개구상은 일본 식민정부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의 지배를 더욱 공공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재정문제로 인하여 구상에 그치고 말았으며,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 것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었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인하여 청계천에 있던 많은 다리들이 수난을 겪었다.
광통교의 경우 다리 옆 전차선이 놓이게 되었으며, 다리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확장되었다. 광통교 교대에는 지름 1m가 넘는 하수관이 묻히게 되었다. 오간수문은 1907년 완전히 헐리었고, 대신 차로와 전차선로 겸용 다리가 놓였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 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관수교, 주교와 같은 근대식 토목공법을 이용한 새로운 다리도 가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