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는 경복궁-육조거리-운종가-(광통교)-숭례문 등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금이 능행(陵幸)을 하거나 성밖으로 행차할 때 이 광통교를 건너다녔으며,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고 갈 때도 가까이에 있는 돈의문을 이용하지 않고 빙둘러 숭례문을 통과하여 이 광통교를 건너 궁궐로 들어갔다. 따라서 광통교는 어가행렬이나 사신행렬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길이 12m, 폭 15m)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 도성건설 때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다. 그러던 것이 1410년(태종 10) 8월 큰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피해가 발생하자 옛 정릉(貞陵)의 무덤 돌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만들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원래 오늘날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통교를 이 정릉의 무덤 돌을 가져다가 만든 데는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이 있었다. 즉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깊은 원한관계가 상당히 작용하였다. 1392년(태조 1년) 계비 강씨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이방원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옹립하였다. 이 일로 계비 강씨는 이방원의 깊은 원한을 싸게 되었다. 그러나 계비 강씨는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1396년(태조 5) 3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자가 된 아들 방석 또한 1398년 (태조 7)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 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1차 왕자의 난).
한편계비 강씨를 무척 총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강씨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일대)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이름하였다. 태조는 이 능을 조성할 때 특별히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석공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 수준의 석물(石物)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수 차례 행차하여 강씨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성북동 정릉인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410년 큰비가 내려 흙다리인 광통교가 유실되자, 이 정릉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돌을 사용 하여 석교를 만들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돌로 다리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강씨에게 맺힌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통교는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서 영광을 누렸으니 태종의 의도대로 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현재 중구 남대문로 광교네거리 중심부에서 동북쪽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을 보면 옛 광통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특히 남북 양측 교대에는 정릉의 부재로 사용되었던 신장석(神將石), 구름문양과 당초문양이 새겨진 무덤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태조가 정릉을 조성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광통교가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다. 1900년 초 서울에 전차노선이 건설되면서 먼저 광통교 동편에 전차길이 놓였다. 또 1918년 이전 다리를 확장할 때 양편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는데, 이때 다리의 난간석이 원래 위치에서 확장된 다리 양편으로 옮겨졌다.
1923년에는 청계천에 암거공사를 하면서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로 된 큰 하수 관을 박았으며, 남쪽 교대에도 역시 하수배출을 위한 토관을 박았다.
1954년 청계천 복개때 서쪽 난간석이 사라 지게 되고, 1958년 청계천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동쪽 난간석이 사라졌다.
현재 창덕궁에 광통교의 난간석 일부가 남아 있는데, 하나의 높이가 약 150cm 정도 되는 것으로 볼 때 광통교가 매우 큰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