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였다. 길이는 약 27.5m, 넓이는 약 8.3m이며, 다리를 받치고 있는 교각 수는 모두 45개이다. 수표교는 1420년(세종2) 축조되었는데, 당시 이곳에 소와 말을 매매하거나 대여해주는 말 시장(마전 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교 (馬廛橋)라고 불렀다.
그리고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계 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 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다시 3·6·9척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 수위로 개천의 범람을 미리 헤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개천은 건천(乾川)으로 평상시에는 물이 조금 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도성 안에서 흐르는 모든 지천의 물이 개천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범람 할 정도로 유량의 변화가 매우 심하였다. 수표에 표시된 1척은 대략 20.3cm 정도로 9척의 경우 수위가 183cm 정도이나 비가 올 때 개천 물이 이 정도까지 차 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표교 옆에 수표가 설치된 이후 수표교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담당 관청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다.
수표는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된 이후 1760년 경진년 개천을 준설할 때 보수되었으며, 순조 때 개천을 준설할 때 새로 만들어 세웠다.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바로 이때 만들어 진 것이다.
수표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수 차례 보수되었다. 다리 한쪽 귀틀석에 '무자금영개조 (戊子禁營改造)’,‘정해개조(丁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자년과 정해년에 각각 다리를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초 수표교에는 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1890년경에는 다리 위에 돌난간이 없었다가 18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과 같은 돌난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고 더불어 수표교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면서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다리에 난간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 기가 남아있다.
조선시대수표교 는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는 영희전(永禧殿, 지금 중구 저동 2가)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영희전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날 등 명절이 되면 임금이 이곳을 전배(展拜)하였다. 따라서 명절 때 임금의 어가행렬이 이 다리를 지날 때면 다리 주위에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어느 날 숙종이 영희전을 전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부근 여염집에서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궐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장희빈이었다고 한다.
수표교와 수표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직전까지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1959년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수표는 다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되었다.